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문단 편집) ==== 이상적인 [[참모장]] ==== 전술한 대로 바이마르 공화국군 시절에 이미 베를린 참모본부에 발탁될 만큼 실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았고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 이후 프란츠 할더가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면서 파울루스는 빠르게 진급했다. 2차 대전 직전에 [[하인츠 구데리안]]이 지휘하던 16군단의 [[참모장]]을 맡았는데, 구데리안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 생각이 고결하고, 영리하고, 양심적이며 근면한 데다 아이디어가 풍부한 참모본부 장교로서 파울루스의 순수한 의지와 애국심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나와 파울루스는 훌륭한 조화 속에서 함께 일했다. > - 하인츠 구데리안, 《한 군인의 회상》 [[파일:external/www.popkulturka.com/paulus-1.jpg|width=600]] ▲ 제6군 참모장 시절, 제6군 사령관인 [[발터 폰 라이헤나우]](左)와 파울루스 1939년에 [[발터 폰 라이헤나우]] 휘하의 10군(나중에 6군으로 개칭) 참모장을 맡아 [[폴란드 침공]], 그리고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네덜란드군]]과 [[벨기에군]]을 몰아 붙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중장]]으로 진급하고 OKH 참모차장으로 승진하였다. 상반된 성격의 라이헤나우와 파울루스는 호흡이 대단히 잘 맞았는데, 라이헤나우는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 타입이어서 작전의 세부적인 면이나 사무적인 일에 신경 쓰는 걸 매우 꺼린 반면, 파울루스는 타고난 참모답게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게다가 배타적이고 사나운 성격 탓에 동료나 부하 장성들과 걸핏하면 말다툼을 벌였던 라이헤나우를 대신하여 10군 사령부를 대표하여 OKH, 16군 사령부와 전화로 연락하며 의견 조율을 담당한 것도 파울루스였다.[* 당시 16군 참모장이 절친인 발터 모델. 파울루스와 모델 역시 외모와 성격 등 여러 면에서 판이하게 다른 친구였다.] 10군은 [[벨기에]] [[레오폴드 3세]]의 항복을 직접 받을 만큼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이렇게 라이헤나우가 파울루스의 실력을 알고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면서 훗날 파울루스가 6군을 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준다. 이후 할더는 파울루스를 OKH로 불러들였고, 중장으로 진급하며 OKH의 핵심 부서인 작전 참모차장의 자리에 오른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소련]] 침공의 세부적인 작전을 짜고 검토했으며, 여러 번의 도상 연습을 통해 10주만에 소련을 정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론은 히틀러의 침공 결심을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라이헤나우가 할더에게 파울루스를 다시 자신의 참모장으로 전속시켜 달라고 요청할 만큼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라이헤나우 지휘의 제6군은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우크라이나]]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으나, [[소련군]]의 거센 저항으로 지연되면서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파면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